평생도를 다시 생각하다

개인의 행복한 순간을 담다 이수경(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선시대(1392-1897) 초년부터 노년까지의 개인 경사들을 그린 장면들과 과거시험을 통과하고 하위직에서 고위직에 이르는 관직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그린 그림들이 전해진다. 개인적 경사들은 돌잔치, 결혼식, 결혼 60주년 기념식이고, 관직 생활은 과거 급제 축하 행사, 관직에 맞게 말, 가마 등의 탈 것을 타고 이동하는 장면들, 은퇴하여 여유를 즐기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의 그림들은 병풍에 적합한 세로로 긴 비단이나 종이 8~12장에 그려져 한 세트를 이룬다. 현재 전하는 그림들은 화풍으로 판단했을 때 19세기 이후부터 20세기 초까지 제작된 것으로 모두 26종이 전해지며, 8면 구성을 따른 것이 대부분이다. 부처와 공자와 같은 성인의 일대기 중 중요한 행적을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전통은 한국, 중국, 일본에 있었지만, 한 개인의 일생을 다수의 장면으로 그리는 예는 한국에서만 확인된다. 조선의 상류층으로서 누리고 싶은 초년부터 노년까지의 행복한 순간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림이다.

많이 보여주지만 더 많이 고민해야 하는 그림

축하받을 개인적인 행사나 고위 관직자의 행차를 그린 그림이므로 다양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과 여러 기물들이 등장한다. 이 그림들에서 조선 19세기 생활 모습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돌잔치와 회혼례, 정승 행차, 관찰사 부임 행렬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시각자료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그림들을 이해하는 데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우선 이 그림들을 부르는 조선시대 명칭을 알지 못한다. 현재 사용하는 ‘평생도’라는 명칭은 20세기 초 기록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조선시대에 이러한 그림을 부르는 명칭이 없었을 수도 있다. 18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문인관료 이채(1745-1820)가 지인 서간수(1734-?)의 관료로서의 삶과 관련된 8폭의 그림들을 보고 지은 글이 그의 문집에 전해진다. 그의 글에 의하면, 서간수가 서당에서 공부하는 장면,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장원급제, 하급직 및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장면, 벼슬에서 물러난 모습 등 관직 생활과 관련 장면을 그린 그림들임을 알 수 있다. 이 장면들은 현재 ‘평생도’라 부르는 그림들 중 관직 생활 장면들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이채는 이 그림 제목을 단지 ‘서간수의 그림 병풍’이라고만 적었다. 아마도 당시에 이러한 그림을 지칭하는 특정 명칭이 없었을 수도 있다.

특정 인물이나 특정 화가와 연결된 이유

그러나 20세기에는 이러한 그림들을 ‘평생도’로 부르며, 1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 화가 김홍도(1745-1806 이후)가 평생도를 그리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그림 중 하나로 이번에 디지털로 복원한 이 병풍은 20세기 초 박물관에 입수되어 ‘모당 홍이상(1549-1615) 평생도’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었는데, 이 병풍 마지막 폭에 김홍도가 1781년에 그렸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 글은 조선 18세기 서체로 쓰이지 않았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는 한자 표기 방식도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그리다’라는 한자로 ‘畫’를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일본식 표기인 ‘畵’를 사용했다. 즉 김홍도가 활동한 시기로부터 100년이나 지난 20세기 초에 적은 글이기 때문이다.

*제8폭의 글은 병풍을 만든 후에 적은 글이라 디지털 복원 작업 시에 지웠음.

그리고 이 병풍 각 폭에 글이 적혀 있어서 그림 내용 파악에 절대적 기준이 되어 왔다. 이 글씨 또한 그림을 그린 시기와 차이가 있다. 화가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한 제목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개인적 행사를 그린 장면은 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있지만 제4폭부터 제7폭까지 그림은 이 글들에 의거하여 한림겸수찬, 종2품 송도유수, 정2품 병조판서, 정1품 좌의정으로서 관직생활을 그렸다고 알려져 왔다. 각 그림들에 등장하는 관리들은 제목에서 밝힌 직급에 맞는 가마나 수레를 타고 있다. 제5폭의 쌍교는 2품 이상 관찰사나 승지가 타는 가마이고, 제6폭의 초헌은 종2품 이상 관리가 타는 외바퀴 수레이다. 제7폭의 평교자는 종1품 이상 관원이 사용하는 것이다. 각 폭에 적힌 제목에 의거해서 관직 명칭에 메어있을 필요가 없다. 동일 직급의 다른 관직에 임명된 관리를 그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제7폭은 좌의정이 아니라 우의정의 행차를 그렸을 수도 있다. 이렇듯 그림에 적힌 모든 글들은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절대적인 정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 병풍의 박물관 등록 정보의 파급력은 컸다. 20세기 내내 이 그림은 김홍도가 모당 홍이상의 일생을 그린 그림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홍도가 그렸다는 글의 서체는 18세기 서체가 아님에도 신뢰성 있는 정보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 이 그림들은 홍이상의 생애와 관련이 없으며, 화풍의 차이로 인해 김홍도의 작품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홍이상은 67세에 사망하여 회혼례와 같은 경사를 누리지 못 했다. 그는 세 차례 과거 시험에서 1등을 하고 종2품 송도유수를 지냈지만, 병조판서와 좌의정에 임명된 적이 없다.

또 다른 병풍이 20세기 중반에 박물관 소장품이 되면서 조선 18세기 중반 활동한 문인 관료 홍계희(1703-1771)의 평생도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그 이유는 병풍 뒷면에 “홍계희 평생도, 평안감사, 내각대신, 회갑연 등의 단어와 함께 김홍도가 그렸다.”는 글이 적힌 종이가 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홍계희는 평생도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이 종이에 적힌 내용과 그림 내용과 다르다. 홍계희는 평안감사나 내각대신을 역임한 적이 없고, 회혼례도 치르지 못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작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다고 볼 수 없는 글들임에도, 이 글들로 인해 작품의 소재와 화가가 확정되었다. 이는 전통 회화 연구에 있어서 회화에 적힌 문자가 그림을 판단하는 데 얼마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평생도는 인물과 기물이 많이 등장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그림이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 그림의 명칭과 작가가 부여되는 과정 또한 그림 속 내용만큼 흥미롭다.

속화의 대명사 김홍도와 관련성

이러한 유형의 다른 작품이 20세기 초 박물관 소장품이 되면서 ‘김홍도 전칭의 풍속도’라고도 명명된 예가 있다. 평생도류의 그림들을 김홍도의 작품 또는 김홍도가 그린 원작의 이모본으로 파악해 왔다. 김홍도가 이러한 유형의 그림을 처음 그렸다는 근거가 없음에도 김홍도의 작품으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김홍도가 인물과 풍속을 모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속화를 잘 그린 화가의 대명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김홍도의 작품 또는 김홍도 전칭작으로 매매되는 사례는 20세기 전반에도 현재에도 비일비재하다.

그의 작품과 평생도를 비교하면 차이점을 극명히 알 수 있다. 그가 1778년에 그린 8폭병풍에는 길 떠나는 나그네, 고위 관료 행차 등 생생한 삶의 현장을 느슨한 ‘Z자 구도’로 담아냈다. 평생도도 이러한 ‘Z자 구도’를 사용했다. 그러나 김홍도 작품과는 달리 평생도는 시선이 화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화면 곳곳에 나무와 가옥을 배치하여 짜임새가 높다. 또한 인물 표정은 김홍도 그림과는 달리 생기가 없이 일률적이다. 따라서 평생도류의 그림들은 김홍도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세속적인 삶의 성취로 점철된 그림

평생도로 불리는 그림들과 홍이상과 홍계희라는 특정 인물 그리고 김홍도라는 특정 화가와 연결시키는 견해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18세기 후반에 홍이상의 후손들이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고 김홍도에게 홍이상의 일생 그림 제작을 의뢰했으며, 현재 전하는 홍이상 평생도는 19세기 전반에 홍이상의 또 다른 후손이 김홍도가 그린 원래 그림을 다시 제작한 것이라고 가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홍이상의 삶과 맞지 않는 장면이 그려진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과연 후손들이 사실과 관련 없는 영화로운 관직생활이 그려진 그림을 원했을까? 당시 인정받았던 홍이상의 업적은 고위 관직이 아니었다. 그의 삶을 기록한 글들에서 그는 충성과 효행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모시고 평양까지 피난갔으며, 피난 중 간신을 처단하라는 충성스러운 상소를 올렸다. 부모에 대한 효행도 지극했는데, 왜란 중 위험을 무릅쓰고 어머니를 찾으러 다녔을 정도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공식 역사기록인 실록에는 그의 절개를 높이 평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의 명문가 출신 관료의 이상적인 삶은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뿐만 아니라 조선의 기본 이념인 유교에서 중시하는 충과 효를 실천하여 칭송받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도에는 정신적 가치가 전혀 표출되어 있지 않다. 오로지 세속적인 성취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세속적인 성취를 담은 그림은 누가 사용했나?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가치관을 반영된 이 그림들의 수요자가 누구였을까? 당시 권세를 누린 가문 사람들이 명문 의식을 바탕으로 가문을 높이기 위해 주문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19세기에는 몇몇 유력 가문들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평균 30대 중반 나이에 과거에 힘들게 합격을 한다고 해도 모두 관직에 임용되는 것이 아닐 정도로 고위 관료가 되는 것은 어려운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소수의 권력 집안에서 소비되었을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을지 의문이 든다. 부와 권력을 이미 갖춘 최상류층에서 세속적 성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병풍이 필요했을까? 평생도에서 추구한 고관대작의 삶은 그들에게는 성취된 삶이기에 이를 꿈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림을 사고 싶은 사람들은 오히려 신분 상승으로 양반이 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제도적으로 나라에 돈을 내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문서를 위조해서 양반이 되려는 사람도 많았다. 돈이 있으면 하급 관직을 살 수도 있었다. 19세기에는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 양반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양반이 되어도 고위 관료가 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고위 관직에 오르고 오래 살아서 회혼례를 치르고 싶어 하는 열망이 이러한 그림들을 유행시켰을 것이다.

조선 사회의 한계와 평생도

조선 사회의 세속적인 삶을 성취한 행복이 넘치는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씁쓸해진다. 평생도는 고위직에 오르고 오래 사는 세속적이고 획일화된 꿈을 공유했던 조선 19세기를 대변한다. 조선에서 이 그림들이 유행했던 19세기에 유럽에서는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발달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새롭게 신분 상승한 사람들도 변화보다는 기존 체제로의 편입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과거시험을 통과해서 관료가 되고자 하는 꿈 외에는 목표가 없었다. 오래된 유교 경전을 깊이 있게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배우고 외웠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현실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은 기대할 수 없었다. 19세기 조선은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평생도를 보면서 다양성과 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태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게 된다.